2024년 11월 27일(수)

벌집제거 출동했다가 적금 깨 '1천만원' 물어낸 소방관

인사이트

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연합뉴스 


[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시민 안전을 위해 맹독성 벌을 제거하러 간 소방관이 도리어 재산 피해를 입혔다며 1천만원을 물어준 황당한 사건이 뒤늦게 알려졌다.


18일 화순소방서 소속 윤모 소방위에 따르면 윤 소방위는 지난해 8월 화순군 한천면에 위치한 염소 농장에 '벌집'을 제거하달라는 농장주 요청을 받고 후임 한 명과 함께 현장에 출동했다.


당시 소방관들이 제거해야 할 벌은 땅속에 사는 장수말벌 종류 중 하나로 한 번 물리면 코피를 쏟을 만큼 독성이 강한 벌이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연합뉴스 


윤 소방위와 후임 소방관은 토치 램프를 이용해 땅 밑에 있는 벌집 구멍이 불을 붙이며 제거에 힘썼다.


그러던 중 갑자기 돌풍이 일면서 염소 먹이를 위해 쌓아놓은 건초 더미 위로 불씨가 옮겨붙었고, 불은 임야 1000㎡를 태우고 1시간 만에 꺼졌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으며 피해액은 소방서 추산 100만원 정도였다고 윤 소방위는 설명했다.


인사이트벌 제거 출동 당시 모습 / 사진 제공 = 윤 소방위 


그런데 며칠 후 염소 농장주 아들이 철조망을 새로 교체해야 하는 등 재산상 피해를 봤다며 윤 소방위와 후임 소방관에 1천만원 보상을 요구했다.


벌집제거, 맹견, 멧돼지 등 유해동물을 퇴치하는 것은 소방관의 '생활민원' 업무 중 하나다. 명백히 공무 중 발생한 재산 손실인 셈이다. 


게다가 윤 소방위는 본인 과실이 아니라는 점도 알았지만 상부에 보고할 수 없었다.


피해액 보상 신청 절차가 매우 까다로울뿐더러 재산 피해가 공무상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을 소방관이 직접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다.


보통 감사원의 변상판정을 받는데, 이 과정에서 '안전조치 미흡' 판결이 날 경우 오히려 윤 소방위가 인사상 문책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인사이트벌 제거 출동 당시 모습 / 사진 제공 = 윤 소방위


결국 윤 소방위는 고심끝에 자신의 적금을 깼고, 후임 소방관과 사비 5백만원씩 모아 농장주에게 보상했다.


이후 윤 소방위 사정을 알게 된 동료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윤 소방위와 후임 소방관에 각각 250만원 가량을 지원해줬다.


윤 소방위는 인사이트와의 통화에서 "사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예를 들어 구급차로 응급환자 이송하다 중앙선 침범해 사고 날 경우 소방관이 배상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인사상 불이익까지 받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고를 냈다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니다 보니 공무상 일어난 일도 그냥 자신의 사비를 털어 해결하는 소방관들이 많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연합뉴스 


윤 소방위는 "화재현장에서 대문을 강제로 따고 들어가도 잘못, 그렇다고 안 따면 안 땄다고 뭐라 한다. 이런 걸 신경쓰느라 소방관들이 엄청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전했다.


과정과 상관없이 결과만 보고 모든 책임을 소방관 개인에게 떠넘기다 보니 적극적으로 구조활동이 어렵다는 게 윤 소방위의 설명이다.


이어 "공무상 발생한 재산피해일 경우 제도적으로 지자체에서 처리해주는 방안이 생겨야 한다"고 덧붙였다.


인사이트기사와 관련 없는 자료 사진 / 연합뉴스 


한편 현행 소방기본법에 따르면 진화과정에서 집기 파손 등이 불가피했다는 점을 소방관이 직접 입증해야 보상책임이 면책된다.


면책받지 못하면 진급 등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대부분의 소방관들이 사비로 해결하고 일을 마무리 짓는다.


소방관이 계속해서 사비로 변제해야 할 경우 구조 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할 수 없어 오히려 국민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에 더불어민주당 윤관석 의원이 화재 진압, 구조 등 공무 중 발생한 사고나 물적 손실에 대해 소방관의 민·형사상 책임을 아예 면제해주는 법안을 발의했지만 1년째 국회에 계류 중이다.


전문가들은 업무 중 물적 손실이 있으면 국가에서 이를 모두 보상하고, 소방관의 면책을 없애주는 소방법 개정안이 하루빨리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불 끄려 문 부쉈는데 '사비'로 물어 줘야 하는 소방관들집기나 건축물을 파손할 경우 소방관이 사비로 배상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어 관련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