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2일(금)

"오늘은 안중근 의사 끝까지 '후원'했던 '독립운동가' 이강 선생의 사망일입니다"

인사이트독립기념관


[인사이트] 김소영 기자 =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의거 뒤에는 우리가 잘 몰랐던 이강 선생의 끊임없는 희생과 후원이 있었다.


53년 전 오늘(13일) 사망한 '오산' 이강 선생. 


그는 17세까지 고향에서 수학하다가 1902년 미국으로 이민을 간 뒤 안창호 선생을 만난 계기로 항일운동을 위해 인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는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해조신문', '대동공보' 등을 창간, 독립운동 및 독립 사상을 널리 퍼트리는데 힘썼다.


1909년 10월 대동공보사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계획이 수립됐을 때에도 그가 있었다.


인사이트한국민족문화대백과


그는 본격적으로 실행된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포살 특공대에 자원했다.


조국의 독립과 항일운동에 목숨을 걸겠다는 결연한 의지였다. 


이때 그의 나의 겨우 31세 때였다.


이강 선생은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성공할 수 있도록 시작과 끝을 함께 하며 끊임없는 지원을 펼쳤다.


그는 안중근 의사와 매우 가깝게 지내며 대동공보사와 안중근 의사가 대화할 수 있는 중간자 역할을 담당했다.


인사이트안중근 의사 / 연합뉴스


또한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성공한 뒤에는 그를 대변할 변호사를 구하기 위해 북경까지 한달음에 달려가기도 했다.


이강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조력자임과 동시에 강성한 독립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도 지속했다.


그는 '대동공보'가 일본 영사관의 압력으로 정간되자 시베리아까지 가서 '정교보'라는 신문을 다시 발행해 독립 사상을 퍼트리는 끈질김을 보였다.


1919년에는 강우규의 일본 총독 폭탄 투척 의거에 연루돼 본국으로 압송된 뒤 50일간 평양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인사이트앞줄 중앙이 이강 선생, 앞줄 우측이 도산 안창호 선생 / 서울흥사단


투옥 후 겁이 나 소극적으로 행동할 법도 한데 이강 선생은 석방되자마자 곧바로 상해로 탈출해 안창호를 만났고 끝까지 임시정부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힘썼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은 후에도 그는 동포들을 위해 대만까지 날아가 선무단의 단장이 되는 등 끝까지 민족을 위해 힘쓰다 사망했다.


이강 선생에게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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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름에 중독된 아버지는 알고 보니 독립운동 투사였다"노름에 중독된 척하던 아버지가 사실은 독립운동 투사였다는 것을 알면 어떤 기분일까.


김소영 기자 soyoung@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