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월)

평생 불끄다 희소병 걸린 소방관에 '공무상 재해' 직접 증명하라는 대한민국

인사이트연합뉴스 


[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몸이 아픈 것보다 평생을 바쳐 봉사했던 국가와 싸워야 하는 현실이 더 서글펐다"


37년간 시민 안전을 위해 목숨 바쳐 일했던 퇴직소방관 이실근씨는 법정 다툼 4년여 만에 희소 질환에 대한 공무상 재해가 인정되자 이같이 말했다.


지난 20일 대법원은 이씨가 공무원연금공단을 상대로 낸 요양급여 청구 소송에서 원심을 파기하고 이씨의 손을 들어 사실상 '공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인사이트대구시 백서 


1977년 소방관으로 임용된 이씨는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 등 37년간 1만 3천여 사고 현장을 출동해 수많은 시민 목숨을 구했다.


그 공로가 인정돼 행정안전부, 소방방재청, 대구시 등으로부터 10여 개가 넘는 표창도 받았다.


투철한 직업의식과 희생정신으로 동료 소방관들에게도 언제나 존경을 받던 그였다. 그러던 중 이씨는 2013년 '소뇌 위축증'을 진단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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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뇌 위축증은 신체 동작을 소관하는 소뇌 크기가 줄어들면서 점차 보행도 어렵고 말도 어눌해지는 희소병이다.


발명 원인도 밝혀지지 않아 꾸준한 치료에도 상황이 호전되기란 쉽지 않았다. 결국 2014년 2월 야간당직 중 의식을 잃고 쓰러진 이씨는 그해 9월 명예퇴직했다.


날렵한 몸으로 화재 현장을 누볐던 그는 이제 지팡이 없이는 거동조차 어려운 환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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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이씨는 두 차례에 걸쳐 의사 소견을 첨부해 공무원 연금공단에 치료비 명목으로 요양 급여를 신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이씨의 희소 질환과 소방관 업무 간의 상관관계가 없다는 결론이 났기 때문.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선 이씨가 직접 자신의 질병과 소방관 업무의 연관성을 입증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 이씨는 의료비를 충당하기 위해 땅까지 팔아가며 오롯이 모든 과정을 혼자 감내했다.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재판까지 갔지만 1심과 2심 재판부 역시 "이씨 질환이 과로나 유독물질 노출로 발생한 것이라는 의학적 자료가 없다"며 공단 측의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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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공익활동을 하고 있는 한 법무법인에서 변호를 자청했고, 이들은 이씨의 공무상 재해를 인정받기 위해 관련 연구결과를 찾는 등 갖가지 노력을 했다.


결국 소송 4년 만에 대법원은 지난 21일 "이씨는 현장의 각종 유해환경에 노출돼 있었으며 이는 현대의학에서 소뇌위축증 원인 중 하나로 추정된다"며 "이씨 질환과 소방관 업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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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공상을 인정받은 그는 기쁨과 동시에 서글픔도 밀려왔다. 수십 년을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쳤지만, 그런 나라와 싸워야 하는 현실이 그를 더욱 아프고 힘들게 했다.


여전히 소방관들은 자신의 질병이 공무와 관계있다는 점을 직접 증명해야만 한다.


중증·희소질환에 시달리는 소방관들이 모든 책임을 떠안지 않도록 법적, 제도적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5년간 정신적 트라우마로 소방관 47명 자살했다최근 5년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소방관이 47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돼 소방관 정신건강에 대한 지원대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