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이하영 기자 = "제가 그냥 늙어볼게요" 배우 설경구가 50대 병수로 변신하기 위해 분장팀에 말했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미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그는 지난여름 삼청동에서 열린 인터뷰에서 '안면 경련'이나 '자연스러운 표정 변화'를 살리기 위해 특수효과 대신 다이어트를 했다고 밝혔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살인마이자 딸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아버지 병수를 입체감 넘치게 표현한 영화 속 장면은 설경구가 아닌 '병수' 그 자체로 보인다.
그가 주연이라는 것을 모르고 영화를 관람하거나 포스터, 스틸컷 등을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설경구와 살인범 병수를 연결하기는 쉽지 않다.
어느 때는 상냥한 회사원으로 또 언제는 거물급 프로레슬러로 많은 경우에 다소 경박해 보이기까지 한 베테랑 형사로 그 외에도 장애인, 성폭행 피해자 아버지, 베테랑 형사, 소방관, 고집불통 아버지 등 그는 어떤 역할을 해도 찰떡 같이 소화해내는 캐릭터 장악력을 보여준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의 연기력을 화력 삼아 쟁쟁한 할리우드 기대작을 제치고 6일 개봉이래 박스오피스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캐릭터 장악력 뛰어난 배우 설경구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며 그의 끝없는 연기 스펙트럼을 가늠해보자.
1. 오아시스(동네 양아치 역)- 2002년 작
'오아시스'는 중증뇌성마비 장애인 여자와 형을 대신해 뺑소니범으로 감옥에 다녀온 남자의 러브스토리다.
설경구는 마른 얼굴, 짧은 머리, 눈에 독기 가득 넣은 얼굴로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남자 종두 역을 완성했다.
2. 광복절 특사(모범수 역)- 2002년 작
'광복절 특사'는 코미디를 위한 코미디에 의한 코미디 영화다. 광복절 특사로 나갈 예정인 것을 모르고 애인이 결혼한다는 말에 탈옥했다 특사 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하고 다시 돌아오는 모범수 재필.
설경구는 재필이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재필인 양 차승원과 함께 온갖 몸 개그를 보여준다.
3. 실미도(684부대 제3조장 역)- 2003년 작
대다수 국민이 실체를 모른 채 존재했던 684 북파 부대. 오로지 조국을 위해 김정일 제거를 위해 극심한 훈련을 거쳤지만 윗선이 교체되며 '유령부대'로 묻힐 처지가 되자 부대원 모두는 실미도에서 탈출해 대방동 유한양행 앞으로 향한다.
억을함을 간직한 강인찬을 설경구는 연기하기 위해 촬영장 근처에 위치한 8km 길이의 해변을 달리고 휴식시간에도 쉬지 않고 운동하며 몸을 단련했다.
4. 역도산(역도산 역)- 2004년 작
역도산은 일본 최고 프로레슬러이자 일본인이 아니어서 스모 선수가 되는 것을 거부당한 함경남도 출신 조선인이었다.
설경구는 굴곡 많은 인생을 산 역도산을 표현하기 위해 28kg이나 체중을 불리고 일본어도 배우는 등 큰 노력을 기울였다.
5. 그놈 목소리(피해자 아버지 역)- 2007년 작
1991년 이형호 군 유괴사건 실화를 다룬 영화다. 아들 유괴 후 단서가 오로지 '범인의 목소리' 하나뿐인 상황에서 40여 일 넘게 수사망을 빠져 나가는 범인에게 직접 접촉을 시도한다.
눈물을 흘리며 돈 가방을 들고 가는 그의 모습에 절절한 부성애 연기로 호평받았다. 이후로 설경구는 '아버지 전문' 배우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다.
6. 강철중: 공공의 적(15년 차 형사 역)- 2007년 작
전세집 한 칸밖에 없는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사표를 제출한 15년 차 베테랑 형사 강철중은 한 고등학교에서 터진 살인 사건을 해결하면 퇴직금을 준다는 말에 사건해결에 뛰어든다.
강철중이 되기 위해 또다시 14kg을 찌운 설경구는 액션 연기 도중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역 없이 격투 장면을 촬영해 캐릭터 몰입도를 높였다.
7. 해운대(어촌 청년 역)- 2009년 작
해운대에 쓰나미가 닥쳤다는 전제하에 시민들이 재난을 이겨내는 과정을 그렸다.
2004년 인도네시아 쓰나미로 예비 장인을 잃고 오랫동안 그 곁을 지킨 순박한 어촌 총각으로 변한 그는 다정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강인하게 변하는 소시민의 면모를 드러낸다.
8. 소원(피해자 아빠 역)-2013년 작
성폭행을 당한 아이와 그 가족이 아픔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감동을 그린다.
충격으로 아빠인 자신마저 무서워하는 딸과 친해지기 위해 한여름에 인형 탈을 쓰고 주변을 맴돈다. 독기 대신 슬픔과 안타까움 그리고 기쁨으로 채운 그의 눈빛이 아버지의 모습으로 오래도록 관객들의 마음에 남았다.
9. 타워(소방대장 역)- 2012년 작
크리스마스날 초고층 주상복합빌딩에서 화재가 발생한다. 사고에 대처하는 각기 각층의 인간군상을 비추며 재난과 인간사에 대해 함께 말한다.
설경구는 믿음직한 소방대장 역을 맡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인물이 된 듯한 캐릭터 일치율로 연기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한다.
10. 나의 독재자(김일성 카피 배우 역)- 2014년 작
남북정상회담 리허설에서 김일성 대역 오디션에 합격한 무명 배우가 그 이후로도 자신의 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그린다.
살을 찌고 빼우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주름과 검버섯은 표현할 수 없기에 특수분장에 도전한 그는 5시간에 걸친 실리콘 분장을 마친 후에 완벽하게 김일성을 재현해 보여 주변의 탄성을 자아냈다.
이하영 기자 hayoung@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