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김연진 기자 = "세상이 바뀌면, 그때 날 고문하세요"
권력의 칼날이 대한민국 사회를 탄압하던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
애국심 넘치는 앞잡이를 자청하며 컴컴한 지하실을 호령하던 '기술자'가 있었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며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목놓아 외치던 시민들은 악명 높은 기술자의 앞에 무릎 꿇고 말았다.
그는 민주화 운동을 간첩 사건으로 조작하기 위해 무고한 시민들을 고문하며 강제 자백을 받아냈다.
실제 고문 사건을 다룬 영화 '남영동 1985'에서 배우 이경영은 기술자 역을 소름 끼치게 재현해냈다.
이보다 더욱 소름 끼치는 것은 영화 속 이야기가 모두 실화라는 사실 아닐까.
1. 괴물의 탄생
유신정권 그리고 제5공화국 시절. 민주화운동에 가담한 인물들을 심문해 간첩 사건으로 조작하는 '기술자'가 있었다.
공군 헌병 출신인 이근안은 지난 1970년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했다.
이후 줄곧 대공 분야에 몸담았으며, '이근안이 없으면 수사가 안 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
주특기는 다름 아닌 고문이었다.
이근안은 "펜 한 자루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2. 권력의 앞잡이
정치군인의 부당한 권력을 부정하며 가파른 역사의 강을 건너고자 노력했던 시민들은 모두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권력의 정당성을 지켜내기 위해 민주화운동 세력을 이른바 '빨갱이'라고 프레임을 씌우던 시절, 이근안은 언제나 앞장섰다.
그는 민주화운동을 주도한 요주의 인물들을 곰팡이 냄새 가득한 지하실로 납치해 고문하며 허위 진술을 받아냈다.
독재정권에 그 공로를 인정받아 경찰 재직 기간 매번 특진으로 고속 승진했고 1979년 '청룡봉사상', 1981년 '내무부장관 표창' 등 모두 16차례의 표창을 받았다.
3. "고문은 예술이다"
지난 1970년부터 1988년까지 경기경찰청 공안분실 실장으로 활동한 이근안은 고문은 곧 '예술'이라고 표현했다.
또한 그는 지금까지도 자신이 '애국 행위', 국가를 위한 명예로운 일을 해왔다고 말한다.
이근안은 지난 2010년 일요서울과의 인터뷰에서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겠냐'라는 질문에 단호히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그것이 애국이었으니까"라고 설명했다.
이어 "자신을 방어하려는 상대방과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치열한 두뇌 싸움을 벌인다"라며 "그런 의미에서 고문도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주장했다.
4. 고문의 기술
고문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이근안이 얼마나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는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피해자들은 "차라리 몽둥이로 맞는 것이 더 견디기 쉬웠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근안은 잠 안 재우기는 물론 물 고문, 전기 고문, 관절 꺾기를 기본적으로 시행했다. 유명한 '통닭구이' 고문도 이근안이 처음 개발한 수법이라고 알려져 있다.
또한 남성 피해자들을 가장 괴롭혔던 고문이 있다. 바로 볼펜심을 요도에 삽입하는 '볼펜심 고문'이었다.
식사 시간에도 고문은 끊이지 않았다.
"남산에 가서 코렁탕을 먹고 온다"라는 말은 괜히 생겨난 말이 아니다.
'코로 먹는 설렁탕'을 의미하는 '코렁탕'. 이뿐만 아니라 라면 국물, 짬뽕 국물 등을 코로 집어넣어 극강의 고통을 주며 강제 자백을 받아냈다.
5. "탁 하니 억"
그 유명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위와 같은 고문 기술로 인해 수많은 시민들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이근안과 얽힌 사건은 다수 존재한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도 바로 이곳에서 벌어졌다.
지난 1987년 1월 유난히 찬바람이 불던 어느 날, 서울대학교 학생이었던 故 박종철은 경찰에 불법 체포돼 지하 고문실로 끌려왔다.
박종철은 물 고문, 전기 고문 등 갖가지 고문을 받던 중 사망했고, 당시 공안 당국은 이 사실을 "탁 하니 억"하고 죽었다고 둘러대며 은폐하려 했다.
이후 해당 사건을 계기로 독재정권의 횡포와 탄압의 진상이 폭로되면서 '6월 항쟁'의 불을 지폈다.
이에 더해 영화 '남영동 1985'에서는 피해자 故 김근태 의원의 사실적인 후기가 그려졌다.
영화 '남영동 1985'는 김근태 의원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각색돼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무자비한 행태를 고발하며 세간에 충격을 안겼다.
결국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던 김근태 의원은 파킨슨병, 뇌정맥혈전증 등을 앓다가 지난 2011년 세상을 떠났고, 결국 대한민국 민주화의 큰 별이 지고 말았다.
6. 누가 죄를 사하였는가
이근안은 故 김근태 의원에 대한 고문 사실이 알려지며 지난 1988년부터 수배를 받아왔다.
이후 12년 동안 수사망을 피해오던 그는 결국 지난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하며 자신의 고문 사실을 일부 시인했다.
법정에 선 이근안은 지난 2000년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된다.
출소 후 이근안의 행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지난 2008년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 한 분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정식 목사로 활동했다.
그는 "무수히 많은 간첩들이 버젓이 활동하는 데도 공안 기능이 무너져 제대로 잡지 못한다"라며 "감옥에서 믿을 수 있는 나라, 배신 없는 나라를 찾다 보니 하늘나라를 찾게 됐다. 그래서 예수쟁이가 됐다"고 설명했다.
故 김근태 의원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근안과 다시 마주했을 때, 이근안은 故 김근태 의원에게 울면서 용서를 구했다.
그러나 이근안은 이후 설교 중에 자신이 故 김근태 의원을 고문했던 이야기를 꺼내며 "건전지로 전기 고문한다고 겁을 줬더니 빌빌거리더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지난 2011년 목사직을 박탈당하고 교단에서 쫓겨난 이근안은 여전히 고문을 '예술'이라고 표현하며 자신을 '애국자'라고 칭한다.
그런 그에게 사람들은 묻는다. 누가 죄를 사하였는가.
김연진 기자 jin@insigh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