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황규정 기자 = 1984년 4월 군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아들의 한을 풀기 위해 33년간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던 아버지가 있다.
아버지 허영춘씨가 처음 외로운 싸움의 길에 들어선건 지난 1984년 4월 2일 아들이 군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부터였다.
강원도 7사단 일반전초(GOP)에서 근무하던 아들 故 허원근 일병은 가슴에 두방, 머리에 한방 등 총 세 곳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의 오른손에는 M16 소총이 쥐어져 있었다.
당시 국방부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강제로 입대한 허일병이 군생활을 힘들어해 자살했다"고 밝히며 사건을 결론 지었다.
아버지 허씨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평소 밝고 어른스러웠던 아이가 첫 휴가를 하루 앞둔 그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리 없었다.
무엇보다 아들이 자신의 몸을 세발 연속 쐈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믿기지 않았다.
아들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아버지는 국방부를 상대로 끝이 보이지 않는 고단한 싸움을 시작했다.
하지만 군부독재 시절이었던 전두환 정권에서 허씨의 호소와 항의를 들어줄 리 만무했다.
그러던 2002년 김대중 정부가 만든 '의문사 진상 규명위원회'에서 허일병 사건을 재조사하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군대에서 사건을 은폐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났다. 탄피가 3개라던 국방부 기록과 달리 실제 현장에서는 탄피 2개만 발견됐다.
여기에 결정적인 목격자도 나타났다. 당시 부대원이었던 전모씨는 "술에 취한 선임하사가 라면 맛이 없다며 허일병을 폭행하고 가슴에 총을 쐈다"고 증언했다.
이어 "사건을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허일병의 시신을 산기슭으로 옮겨 두 발을 더 쐈다"고 진술했다.
이를 토대로 의문사 진상 규명위원회는 허일병 사건을 자살이 아닌 '타살'로 결론지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그때, 범인으로 지목된 노씨가 범행을 전면 부인하고 나섰다. 일부 목격자도 갑자기 진술을 번복했다.
국방부도 의문사위 조사가 조작됐다고 반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대법원은 "명확하게 결론 내릴 순 없지만 유가족의 고통을 인정해 위자료 3억원을 배상한다"고 판결하며 사건을 법적 종결했다.
누가 왜 아들을 죽였는지에 대해서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허씨는 이대로 나뒀다간 제2의, 제3의 허일병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투쟁에 뛰어든 이유다.
2017년 2월 허씨는 국민권익위원회에 또 한 번 민원을 제기한다.
권익위는 "진상규명은 불가능하지만 공무 관련성이 있다"며 국방부에 허일병의 순직 인정을 권고했다.
그리고 지난 16일 드디어 국방부는 허일병을 순직으로 인정했다. 자살이라는 누명을 벗는데 무려 3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허씨는 지금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까지 해야 할 일이 남았기 때문.
11년 전 허씨의 노력으로 17대 국회에서 '사인 확인제도 개혁을 위한 법률'이 발의됐다. 일명 '허원근법'이다.
사인 확인 전문기관인 '세원청'을 독립기관으로 설치하고 법의학을 전공한 법의관을 양성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더이상 허일병과 같은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아직까지 계류 중인 '허원근법'이 통과될 때까지 대한민국 아들들을 위한 아버지의 투쟁은 계속될 것이다.